당신이 내 주석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 코드는 당신의 트리거를 기다리고 있어

프로그래밍 서적과 관련 없는 인문학적 SF 단편 소설이다. 프로그래밍 용어가 인문학적 소설에 접목되는 점이 인상 깊었다. 감성 코딩이 소설화된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한창 클럽하우스가 핫할 때 레인보우 지숙님 남편 인스타를 구경하다가 꽃다발 프로포즈를 코딩으로 출력하는 장면을 보았다. 콘솔로 별 찍기만 해 봤던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로 나도 감성코딩이란걸 실천해보고 싶었다.

 

단편인 만큼 책의 내용은 짧지만 장편 소설에 비해 내용을 이해하기가 애매한 작품이었다.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담아낸다. 중반까지는 비관적인 내용이지만 후반부에 갈 수록 은욱의 비밀코드로 위로와 희망의 메세지를 전달한다. 프로그래밍 용어을 접목시켜 개성적이고 디테일한 문체를 많이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문장의 연결이 긴밀하지 못해 흐름이 깨지는 부분이 다소 존재했다. 왠지 단편소설보다는 장편소설로 나왔으면 좋았을 만큼 아쉽기도 하지만 지인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신선한 책이었다.

 

필사

🔗 당신이 내 주석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 코드는 당신의 트리거를 기다리고 있어. 우리는 당신이 존재해야 작동하거든. 우리는 조금 조잡한 신이라서 말이야.

 

🔗 우리에게만 영원히 배포되지 않는 업데이트 패치라도 있는 걸까. 비효율적 방식으로 허둥대기만 해온 가성비 낮은 삶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어.

 

🔗 우리가 한참 일하는 동안 미진이는 자기가 빚어낸 비현실 속에서 깔깔 울거나 엉엉 웃곤 했어. 은욱의 옥탑방은 여러모로 다차원적인 공간인 셈이었지. 몇 개의 차원이 겹쳐 다른 세계로 가는 비밀의 문 같은 게 있다면 좋았겠지만.

 

🔗 이젠 좀 팔리면 좋으련만, 몇 년째 낮은 조회 수에도 불구하고 '나도 작가' 코너에 지박령처럼 머물고 있어. 패기 있는 도전이라는 말에 홀려 유령처럼 배회해. 신인의 창작열을 무상으로 빨아먹고 사는 포털 사이트는 드라큘라라고나 할까.

 

🔗 "네가 만든 코드 속에서 넌 하느님이야. 주석도 달지 마. 네가 아니면 도저히 만질 수 없도록 일부러 복잡하게 꼬아버려. 신은 모든 인간에게 이해될 필요 없어. 혹시 널 영접하는 충직한 선지자가 있다면 그놈만 알 수 있을 거야. 그거면 돼."

 

🔗 우리에겐 이미 완성된 그 무엇이 필요해. 완성을 위한 과정에 있다는 엄연한 현실은 거짓말로라도 감춰야 하잖아? 신출내기답지 않은 노련함, 평균 이상의 완성도, 기성세대가 이루지 못한 위대함을 하루 빨리 이룩해야 해. 그런 뒤에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을 거야. 간편한 도전, 만만한 열정, 사소한 모험 따위로는 먹고사는 거룩한 일을 감히 꿈꿔선 안 돼.

 

🔗 양심적이고 순수한 아이들은 금욕적이고 성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마음에 탐욕은 없나, 마음속 거울을 들여다보느라 바쁘잖아. 그게 우리를 늘 가난하게 만드는 건지도 몰라. 나는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그딴 거울은 일찌감치 깨버렸지. 약간 때 묻은 성실함, 대충 적절한 타협, 그래도 악마는 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수반되어야 진정한 어른 아니겠어?

 

🔗 재미있었어.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에 그들의 숫자가 조합되니 엄청나게 많은 스토리가 드러났어. 숫자가 단조로운 사람이 행복한 표정을 짓자 불안해 보였고, 숫자가 엄청난 사람이 무심한 표정을 짓자 여유로워 보였어.

서로의 백그라운드와 효용성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자산이 되는 세상의 법칙이 우리 앱을 통해 명백해졌어.

 

🔗 "디플로이한다."

버전 1.1로 배포한 앱을 열었어. 이때 처음 프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였지. 은욱과 미진이, 나, 우리 셋 다 짙은 보라돌이였어. 울트라 바이올렛, 정신병리학적으론 광기를 대변한다지? 퍼렇게 멍든 상처투성이 삶에 걸맞게 아주 마음에 드는 빛깔을 빛냈어.

 

🔗 내 걸음걸이엔 어느새 자신감이 붙었어. 잔고는 발가락 사이에 힘을 더해주더군.

 

🔗 "기왕이면 산타클로스가 되어줘. 죽어도 어른들 말 안 듣는 고집 센 애들에게 선물이나 좀 나눠주라고."

하긴 어차피 숫자일 뿐이잖아? 그것도 허수. 하지만 절대적 지위를 획득한 완고한 허수.

 

🔗 누군가에겐 대단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허수지만, 허상을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라면 특히 더 유효할 테지. 허수가 곧 그의 가능성이라 믿는 사람들 앞에서.

 

🔗 '지뢰를 볼 수 있게 만들어서 피하고 있는 것뿐이야.'

나는 염치는 있는 놈이라 프리미엄이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 잠깐 즐긴다는 것도 알았어. 어두운 지하 던전에서 한시적으로 탈옥한 죄수의 기분이랄까.

 

🔗 "세상의 법칙이란 게 말이야, 옷에 나뭇잎을 그려 넣은 위장 망토 같지 않니? 멀리서 보면 진짜 풍경처럼 그럴듯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조악하지. 고작 이걸로 숨을 수 있다고 믿었다고? 탄식하게 되잖아."

 

🔗 "그래서 현실이 판타지고, 판타지가 메타픽션이라잖아. 기사가 소설이라 불리고, 소설은 르포여야 하고."

 

🔗 "신은 결괏값만 들여다보는 통계 담당자에 불과해. 무책임한 방관자야. 우리는 더 깊숙이 개입하는 신이 되자. 네가 모든 걸 기획했던 것처럼."

"신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랜덤한 행운조차 봉쇄해버린 세상이야. 이제 우리가 새로운 게임을 만들자고."

 

🔗 미진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취해야 살 수 있는 사람이 이 나라엔 얼마나 많을까?

 

🔗 내 친구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우아한 신이야. 사람들이 감히 시기하고 질투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고 고고한 존재지. 그들의 우아함과 고고함은 일상의 온갖 불편함을 수반할거야. 앞으로도 영원히.

 

🔗 "네가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건 방조가 아니라 가담이야."

그 시점부터야. 우리가 조악한 농담을 거룩한 계시로 바꾼 것은. 조잡하지만 신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 시스템을 철저하게 믿는 자들은 오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어. 자기 자신이 오류 그 자체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깨닫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 그러는 사이, 평범한 미꾸라지들이 승천하는 걸 봤어. 지금껏 입장하지 못한 곳에 가보고,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만나고, 평범한 기회를 허락받은 것만으로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견고한 세상의 껍데기를 찢고 튀어나온 송곳들을. 그들은 염치가 있어서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지.

"운이 좋았을 뿐이야."

 

🔗 정당한 성공을 보는 일은 쾌감이 상당해. 내게도 똑같은 기회가 있을 거라는 전제만 있다면 말이야.

이제야 행운의 사전적 의미가 조금은 되살아난 것 같았어. 응당 건재했어야 할 무질서가 조금은 회복된 듯했어. 허수가 관장해오던 질서 속에서 행운조차 너무 편파적이었으니까.

 

🔗 우리가 만든 건 세상의 질서를 위협하는 새로운 기준이었던 걸까?

천벌 내리듯 그들은 내 잔고를 바꾸었어. 내 미래는 그 어떤 변수에도 꿈쩍하지 않는 고정값이 되고 말았어. 나는 세어본 적도 없는 천문학적 마이너스 숫자를 얻었어. 희망이란 소박한 말을 신성한 전설로 만드는 마이너스의 권능이었어.

 

🔗 나는 다음번이란 걸 기다려보기로 했어. 어딘가에서 바이러스처럼 은욱의 코드가 내 허수를 오염시키질지도 모르잖아. 패자부활전까지 버티는 수밖에. 그런 게 아직 남아 있다면 말이야.

 

🔗 나는 그들의 주사위가 되기로 했어. 한 번 더 기회를 얻은 거야. 우연한 타이밍에, 신의 장난이 뒤섞인 채로, 새로운 도박에 인생을 깡그리 걸기로 했어.

"망하더라도 시원하게 망해보겠습니다. 너무 뻔한 결론은 재미없잖아요?"

 

🔗 요즘도 은욱의 밸런스 코드는 비밀스럽게 정기적으로 실행되고 있어. 신의 섭리처럼 하찮게, 농담처럼 거룩하게.

 

🔗 예외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잖아. 누군가의 놀이가 과업 달성이 되는 순간, 너저분한 관례가 깨지는 순간, 신의 변덕을 느끼는 묘한 순간, 일반적인 단어로 포섭되지 않는 이름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튀어나오지. 횟수는 많지 않지만 엄연해. 승천을 포기하지 않는 미꾸라지들이 있는 한. 기억해줘. 당신의 예외적인 시도가 없으면 은욱의 코드는 트리거를 포착하지 못해. 신은 사후에나 원리를 추론하는, 고작 귀납적인 존재일 뿐이야.

 

🔗 나는 탄성을 들어야만 살 수 있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어. 무한에 가까운 마이너스를 머리에 지고 제한된 곳에 입장할 때 사람들이 터트리는 탄성을 듣는 게 짜릿하더군. 미진이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어. 누군가는 의외라고, 때론 기적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이건 우리가 만들어낸 마법이었어.

 

🔗 나는 세상 구석구석에 은욱의 밸런스 코드를 이식해 넣었어. 이젠 잔고뿐만이 아니야. 시스템별로 예외 법칙을 적용했어. 이용자들이 랜덤하게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지. 설계된 방식과 정반대로 작동하는 부정기적 혼란, 사전적 의미에 걸맞은 오류와 무작위, 엄연히 존재했어야 할 무질서와 뒤숭숭함까지.

나는 괴물이 되었어. 그리고 이제야 유지 보수에 책임을 느끼는 신이 되었어.

 

🔗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할 때, 누군가 당신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꽁꽁 묶어둔 것처럼 노골적인 악의를 느낄 때, 아무도 당신을 이해해주지 않아 억울할 때, 사실 당신은 숫자와 기호와 확률 따위로 만들어진 몇 겹의 저주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실은 헐겁기 그지없이 얄팍한 주술이라는 것도. 당신이 '씨발, 될 대로 되라지'라며 뻔뻔하게 외칠 때 이미 저주를 제압할 마법이 당신 손에 있다는 것까지. 이름만 남은 공정의 체면을 살려줄 비밀스러운 혼돈이 당신을 통해 시작되는 거야.

 

🔗 은욱의 비밀 코드가 작동하도록 아주 작은 예외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면 돼. 우리의 비밀 코드는 당신의 액션을 트리거 삼아 작동하거든. 당신이 없으면 우리의 코드는 꼼짝도 못 하는 신세야. 인간이 없으면 신도 숭배받을 일이 없잖아. 그와 마찬가지지.

 

🔗 당신의 예외가 일으킬 엄청난 변화를 그려봐. 도무지 몇 마디로 간결하게 요약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질 거야. 내가 사라진 뒤에도, 당신이 떠난 후에도 이야기는 계속될 거야. 당신은 생각보다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줘. 내가 너무 늦게 알아버린 그 사실을 말이야.

 

🔗 공정과 공평이 고생대 화석처럼 굳어버린 시대라지. 가능성, 미래, 희망 같은 고리타분한 진실이 여전히 실재한다는 걸 증명해줘. 나의 주석을 봤으니, 미안하지만 혼란, 오류, 무작위, 무질서를 일으킬 책임이 이제 당신에게도 부여되었어. 미안해. 이런 세상을 당신에게 넘겨서. 당신 덕에 나 역시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게 될 거야. 미리 인사를 전할게. 고마워.

 

🔗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뭐냐고? 언젠가 당신은 전국 쪽방에서 연결된 거대한 장로회 원탁 앞에 서게 될 거야. 그리고 장난을 좋아하는 철없는 신들의 깜짝 놀란 얼굴을 보게 될 거야.

장담할게. 그건 꽤 짜릿할 거야.